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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Photo Story/Europe

빈 호프부르크

호프부르크 왕궁(Hofburg)

10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220년경 건축되었다.
이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들이 기거하였고,
지금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되며 승마학교, 국제회의장,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다.

황제들마다 자신이 거처하는 동안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왕궁 내 건축물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보이도록 독특한 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인데,
이에 따라 예배당은 15세기 중반,
아말리엔호프·스탈부르크는 16세기,
레오폴트 저택은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저택, 황실사무처, 스페인 승마학교,
세계 최대의 그래픽아트 미술관인 알베르티나(Albertina)와 국립도서관은 18세기,
노이부르크(Neue Burg)는 1914년에 조성되어 각각 서로 다른 다양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왕궁으로 나누어지며,
신왕궁은 무기·악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구왕궁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소년합창단이
일요예배 찬양을 하는 왕궁예배당을 비롯해 왕궁보물창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승마학교인 스페인 승마학교(Spenisch Reitschule) 등이 있다.
전 황제가 사용하던 방은 다음 황제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불문율 때문에 무려 2,600개나 되는 많은 방이 있고,
나폴레옹에게 대승을 거둔 카를 장군,
나폴레옹의 장인인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로는 프란츠 1세) 등의 기념상이 있다.

외관상으로 장엄하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주변의 조망이 매우 아름답다.
미카엘 광장을 향한 반원형 문 중앙에 위치한 아치는
금도금한 청동살로 장식되어 있고 부근에 2개의 큰 분수가 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왕궁의 부르크문을 지나 나아가면 마리아테레지아 광장에 이른다.

 

 

 

 

 

 

 

 

 

 

 

 

 

 

 

 

 

 

 

 

 

 

 

 


 


 

 

 

 

 

 

 

 

 

 

 

 

 

 

 

 

 

 

 

 

 

 

 

 

 

 

 

 

 

 


 

 

 


 


 

 

 

 

 

 

 

 

 

 

 

 

 

 

 

 

 

 

 

 

 

국회의사당 

 

 

 

 

 

 

 

 

 

 

 

 

 

 

 

 

 

 

 

 

 

 

 

 

 

 

 

 

 

 

 

 

 

 

 

 

 

 

 

 

 

 

 

 

 


 

 

 

 

 

 

 

 

 

 

 

 

 

 

 

 

 

 

 

 

 

 

 

 

 

 

 

 

 

 

 

 

 

 

 

 

 

 

 

 

 

 

 

 

 

 

쉔부른 궁전과 호프부르크 왕궁하면 떠오르는 것이 마리아테레지아 대제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재위 1740~1780)로서 쉔부른궁전, 호푸브르크 왕궁 등 그녀가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다.
유럽의 어느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그 도시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 도시를 부흥시킨 사람, 그리고...
아마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마리아테레지아를 가장 먼저 떠로으게 될 것이다.


카를 6세의 장녀이며, 토스카나 대공(大公)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였는데(1736),
부제(父帝)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모든 영토를 상속하였다.


그러나 부제의 생존 당시의 상속법인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이 이미 각국의 승인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각국이 그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넘겨주었으나,
숙적(宿敵) 프랑스와 대립하는 영국과 손을 잡아 교묘하게 일을 처리하여,
아헨조약(1748)에서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전쟁 중에 남편을 황제(프란츠 1세)로 세워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남편에게는 정치적 능력이 없어 그녀가 모든 국정(國政)을 담당하였다.


그 후 재정(財政)의 재건과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여 슐레지엔 수복을 목표로 프로이센과 7년전쟁(1756∼1763)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이 등을 돌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하였다.
남편의 사망(1765) 후로는 아들 요제프 2세와의 공동통치로 바꾸었다.

내정(內政) 개혁에는 급진주의적인 요제프 2세를 견제하면서 부역(賦役)의 경감,
수도원영지(修道院領地)의 몰수, 교육제도의 개혁 등에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딸의 제위(帝位) 상속은 생각하지 않았던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어 얌전한 여성으로 자라게 했으나,

마리아는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자녀를 16명이나 두었으며,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었다.

마리아테레지아의 자녀들을 보면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5남 11녀(총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 엘리자베트 (1737-1740)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1738-1789) - 수녀가 됨
마리아 카롤리네 (1739-1741)
요제프 2세 (1741-1790)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
마리아 크리스티나 (1742-1798) - 작센-테셴 공작 알베르트와 혼인
마리아 엘리자베트 (1743-1808) - 인스부르크 수녀원장
카를 요제프 (1745-1761)
마리아 아말리에 (1746-1804) - 파르마 공작 페르난도와 혼인
레오폴트 2세 (1747-1792)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
마리아 카롤리네 (1748)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레 (1750-1762)
마리아 요제파 (1751-1767) - 나폴리 왕과의 결혼 직전에 사망
마리아 카롤리네 (1752-1815) -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와 혼인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1754-1806) - 모데나 공작
마리 앙투아네트 (1755-1793) -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혼인
막시밀리앙 프란츠 (1756-1801) -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


자녀들이 많으니 유명한 사람도 많이 나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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